1. 구약의 하나님, 공의와 심판의 상징인가? –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오해
많은 사람들은 구약 성경의 하나님을 읽을 때, 그분을 무섭고 분노에 찬 신으로 인식한다.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는 명령, 아간의 죄로 인해 가족까지 돌에 맞아 죽는 장면(수 7장),
우사를 벌하신 일(삼하 6:6–7) 등은 하나님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무자비한 존재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러한 묘사들은 종종 “구약의 하나님은 잔인하고 두렵다”는 이미지로 굳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구약 성경 전체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단편적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와 심판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인내와 자비의 하나님으로도 등장한다.
예레미야애가 3장 22절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히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라고 고백한다.
또한 요나서에서 하나님은 이방 민족인 니느웨 사람들조차 회개할 기회를 주고 용서하신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이 수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도,
하나님은 그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언약을 회복하신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무작위적 분노가 아니라, 불의에 대한 정의로운 응답이며 언약적 사랑의 경고다.
그분은 죄를 미워하시되, 죄인을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다.
즉, 구약의 하나님은 오히려 사랑 때문에 진노하시는 분,
백성의 생명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2. 신약의 하나님,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인가? – 예수 안에서 드러난 자비의 본질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라고 선언하며,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포용적인 사랑을 나타내셨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신약의 하나님을 자비롭고 따뜻하며, 죄를 덮어주는 은혜의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구약의 하나님이 “두렵고 떨리는 존재”였다면,
신약의 하나님은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사랑의 아버지”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식사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과 함께하셨다.
그분은 율법보다 긍휼을, 형식보다 본질을 강조하셨다.
심지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했다 (눅23:34).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이 심판보다 구원을 원하시며, 정죄보다 회복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신약에도 심판의 하나님은 분명히 존재한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꾸짖고, 회개하지 않는 도시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하셨으며,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최종적 승리를 강하게 묘사한다.
즉, 신약의 하나님은 단지 사랑만 있는 분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를 함께 가지신 분이며, 악에 대해 침묵하지 않으시는 거룩한 존재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3. 하나님은 변화하시는가? – 구약과 신약 속 동일하신 하나님
신구약의 하나님이 마치 서로 다른 인격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성경의 표현 방식, 시대적 상황, 그리고 하나님 계시의 단계적 진전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으신다.
말라기 3장 6절은 “나는 여호와라 변하지 아니하나니”라고 선언하고,
히브리서 13장 8절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곧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확증이다.
하나님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계시하셨을 뿐,
그분의 성품 자체는 일관되게 유지된다.
구약은 인간의 죄와 불순종에 대해 공의로 반응하셨고,
신약에서는 그 죄를 대신 짊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비와 용서를 드러내시는 구속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
즉,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은 시대마다 다르게 표현되었지만,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온전한 균형 안에서 함께 작용한다.
우리가 구약을 통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신약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잘못된 균형이다.
하나님은 구약에서도 자비로우셨고,
신약에서도 공의로우셨다.
단지 우리의 해석과 시선이 부분적 이해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
이제는 구약과 신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통합적 성품을 온전히 인식하는 성숙한 신앙이 필요하다.
4. 신앙 실천 속의 하나님 이미지 –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따를 것인가?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단지 신학적 개념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느냐에 따라 신앙의 실천 방식, 삶의 태도, 타인과의 관계까지 달라진다.
즉,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왜곡되면, 그 왜곡된 이미지를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위험이 따른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철저히 심판과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이해하는 신자는 항상 죄책감과 수치심 속에 머물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오직 무조건적 수용으로만 받아들이는 이들은 죄에 대한 책임감 없이 은혜만을 남용할 가능성이 있다.
이 두 극단은 모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균형 잡힌 성품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다.
신앙의 건강성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동시에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공의는 인간의 삶에 기준을 세우고, 책임을 묻는 하나님의 질서이고,
자비는 그 기준을 넘지 못한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이다.
이 둘은 결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유기적으로 결합된 ‘진리 안의 은혜’**로 이해되어야 한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되는 경향이 많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받는다’, ‘무조건적인 용서’ 같은 표현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안정을 주지만, 때로는 회개 없는 신앙, 책임 없는 제자도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 경외, 거룩함 같은 성경적 개념들이 교회 강단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반대로, 율법 중심의 교회 문화에서는 하나님을 감시자나 재판관처럼 인식하기 쉽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신자들이 행위 중심의 신앙, 형식적인 경건 생활, 두려움 기반의 복종에 갇히게 된다.
이런 신앙은 외형상으로는 경건해 보일 수 있으나,
내면의 자유, 기쁨, 자발성, 성령의 능동적인 역사가 사라진 신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단순히 ‘사랑’ 혹은 ‘심판’으로만 나누어 이해하는 오류를 피해야 한다.
성경 전체의 흐름은 하나님을 진리와 은혜가 완전하게 조화된 인격적인 존재로 소개하고 있으며,
그분은 우리를 경외심으로 다스리되, 사랑으로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올바른 하나님 이미지를 기반으로 할 때,
우리의 신앙 실천은 율법과 자유, 질서와 창조성, 회개와 회복 사이의 균형을 갖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기도는 단지 바라는 것을 구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앞에서 나 자신을 비추고,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훈련이 된다.
예배는 형식이 아니라 존재 전체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영적 응답이 되고,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구체적인 실천이 된다.
또한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정확히 전하고 실천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목회자와 교사는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균형 잡힌 성품을 삶으로 증거 하는 존재여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정죄하거나 통제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방임과 무기준의 사랑만을 말해서도 안 된다.
진짜 신앙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아는 것에서 시작되고,
그분을 경외함과 사랑으로 동시에 따라가는 것에서 완성된다.
이것이 바로 구약과 신약 속에서 동일하게 계시된 하나님을
우리 시대에 신실하게 증거 하는 신자의 길이며,
신앙과 윤리, 진리와 자유를 모두 아우르는 성숙한 영성의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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