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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학

고대 유대인의 종교생활과 성서의 율법

1. 토라 중심의 신앙 – 유대인의 삶을 지배한 하나님의 말씀

고대 유대인의 삶은 단순한 민족적 정체성보다,
하나님의 율법인 ‘토라’(Torah)를 중심으로 구성된 종교적 정체성이 핵심이었다.
토라는 좁게는 모세오경(창세기~신명기)을 의미하고,
넓게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가르침과 계명 전체를 포함한다.

이 율법은 단순한 종교 규칙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식사, 옷차림, 노동, 성생활, 농사, 세금, 정의 실현 등—에 적용되는 ‘삶의 지침’**이었다.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에는 정결 규정, 제사 규례, 도덕법, 사회법, 형법 등 약 613가지의 율법 조항이 담겨 있으며,
이는 단지 신앙인의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총체적 훈련이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된 후 받은 것이며,
출애굽 사건 이후 “너희는 나의 백성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라는 언약 관계를 체결하는 핵심 도구였다.
즉, 율법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삶의 지도였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유대인에게 율법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자,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근본적인 삶의 기준이었다.

 

고대 유대인의 종교생활과 성서의 율법

2. 예배와 제사의 삶 – 성전 중심 종교의 구조

고대 유대인의 종교생활은 성전과 제사 중심의 예배 구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단순한 예배당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장소이자, 죄 사함 과 정결 회복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공간이었다.
성전 제사는 모든 유대인의 영적 삶을 구조화하고 중심 잡아주는 핵심이었다.

레위기에는 번제, 소제,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 등 다양한 제사 방식이 소개된다.
각 제사는 죄에 대한 속죄, 하나님과의 화해, 감사와 헌신의 표현 등 구체적 목적에 따라 시행되었고,
이 제사를 통해 유대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유지하고 회복할 수 있었다.

특히 대속죄일 (욤키푸르)과 유월절은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절기이자, 집단적 회개와 구속 사건을 기념하는 거룩한 시간이었다.
제사장 계층은 이러한 제사를 집례 하며,
성전 중심 사회에서 종교적 권위와 사회적 영향력을 동시에 갖는 존재로 기능했다.

이러한 제사 구조는 단순히 종교 행위가 아니라,
사회 질서와 공동체 정체성 유지에도 절대적 역할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처럼,
고대 유대인에게 제사는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계속 살아가기 위한 핵심 행위였다.

 

3. 일상 속 율법 실천 – 식사, 정결, 안식일의 생활화

율법은 단지 예배당 안에서만 적용되는 종교적 규칙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대 유대인의 일상은 매 순간 율법을 실천하는 경건의 훈련장이었다.
하루 24시간, 삶의 모든 행동이 율법의 지침 아래 놓였고,
신앙은 삶과 분리될 수 없는 통합적 구조로 작동했다.

먼저 식사 규례를 보면,
정결한 동물만 먹을 수 있으며, 피를 제거하고, 특정한 조리법을 따라야 했다.
레위기 11장은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지 말아야 할 동물을 구분하며,
유대인은 이를 통해 거룩함을 삶의 기본적인 행위 속에서 실천하도록 훈련받았다.

정결 규례 또한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여성의 생리, 시체 접촉, 피부병 등은 부정한 상태로 간주되었고,
해당 기간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따라서 유대인은 자신의 몸과 주변 환경을 철저히 관리하며,
거룩함과 정결함을 유지하려는 삶의 태도를 내면화했다.

또한 안식일(Sabbath)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상징이자,
**일상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시간의 거룩한 구분’**이었다.
안식일에는 노동이 금지되었으며,
가족과 함께 식사하고, 말씀을 낭독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하는 영적 쉼의 날이었다.
이처럼 고대 유대인의 일상은
율법에 의해 통제된 것이 아니라, 율법 안에서 의미를 부여받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4. 율법의 목적과 현대적 교훈 – 규율을 넘어 관계로

고대 유대인의 율법 실천은 겉으로 보기에 규칙 중심, 형식 중심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핵심에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율법은 인간을 제한하거나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한 억압의 도구가 아니라,
죄악과 혼돈으로부터 보호하고, 삶을 질서 있게 구성하며,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인도하는 지혜의 표현
이었다.

예를 들어, 안식일 규례는 단순히 ‘일하지 말라’는 금지 조항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쉬신 것을 기념하며,
노동에 지배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삶을 실천하는 방법
이었다.
즉, 율법은 외적 규범이 아닌,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식으로서의 영적 삶의 리듬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율법은 본래의 의미에서 점점 멀어졌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보다 철저히 지키기 위해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이름의 구전 율법까지 만들어냈고,
이로 인해 율법의 형식은 살아남았지만 그 정신은 사라지는 왜곡 현상이 나타났다.

예수님은 이런 왜곡에 대해 단호하게 비판하셨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그리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나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여기서 '완전하게 하다'는 말은 단지 ‘지켜주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이 궁극적으로 말하려던 바를 예수님 자신이 실현하고 드러낸다는 신학적 선언이었다.

예수님은 율법의 요약을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이웃을 너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7-40)로 정의하셨다.
이는 율법 전체의 목적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며,
모든 율법이 결국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건강한 관계 회복을 위한 것이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신약 시대 이후, 초대교회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특히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로마서 등에서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도,
**율법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갈 3:24)**라고 설명하며
그 역할을 부정하지 않았다.

즉, 율법은 죄를 인식하게 하고,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만드는 영적 거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그 율법은 자유와 은혜, 사랑으로 다시 해석되고 살아나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은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야 할까?
첫째, 문자적 규칙이 아닌 율법의 정신을 분별하여 실천하는 신앙적 통찰이 필요하다.
예컨대, 오늘날 정결법이나 제사법을 그대로 적용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거룩함, 구별됨, 하나님의 주권 인식, 감사의 삶은 여전히 우리의 신앙을 지탱하는 핵심 원리다.

둘째, 율법을 사랑 없이 적용하는 경건주의적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사랑 없는 율법은 사람을 억누르며 공동체를 해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 2:27)라고 말씀하신 것은,
율법의 참된 목적이 사람을 살리고 자유하게 하는 데 있다는 복음의 핵심 선언이다.

셋째, 율법은 여전히 우리 삶의 거울이며 안내자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
그리고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죄성을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율법을 무시하거나 폐기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하고,
그 정신을 따라 살아가는 성숙한 신앙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고대 유대인의 율법 생활은
오늘날 우리에게 단지 지나간 종교 관습이 아니라,
‘신앙과 일상, 하나님과 사람, 정의와 거룩함’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신학 교과서다.
우리는 그 율법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해석된 말씀을 따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